소설가 김영하의 2022년 작품 '작별인사'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작가가 2019년 한 구독형 전자책 서비스 플랫폼에 연재했었던 '기계의 시간'이라는 초고를 개작과정을 통해 '작별인사'라는 이름으로 분량을 늘려 다시 쓴 소설이라고 합니다. 사실 책의 내용을 모른 채 작가를 믿고 선택했던 책이었는데 평소에 즐겨 읽지 않던 새로운 소재의 소설로 즐겁게 읽어 그 리뷰를 공유해 봅니다.
(전체 스토리의 흐름이 담겨있어 스포일러라고 느껴지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소설 '작별인사'의 첫 페이지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했다는 다음의 말이 적혀있는데, 이것이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표현이자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아닐까 싶다.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풍경의 어느 미래, 주인공 철이는 로봇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휴먼 매터스라는 회사의 평양캠퍼스에서 로봇연구자인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철이는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고, 아버지에게 역사와 천자문을 배우고, 길가에 죽어있는 새를 정성스레 묻어주며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는 평범한 소년이다. 학교에 다니기보다 홈스쿨링으로 공부를 하고,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한 마리의 고양이 로봇과 함께 살고 있다.
조금은 고루한 면이 있는 아버지 최진수 박사는 고양이들에게 철학자들의 이름을 붙여줬는데, 늘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어 마치 깊은 사색에 빠진 것 처럼 보이는 '데카르트'는 로봇 고양이이다. 정확한 스케줄에 따라먹고 싼다고 해서 '칸트'라고 불리는 고양이와 책상 위에 물건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 낙하실험을 하는 것 같다고 하여 '갈릴레오'라고 불리는 고양이까지 두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살고 있다.
철이는 휴먼 매터스 캠퍼스의 바깥세상이 궁금하긴 하지만 매일 정해진 범위 안의 생활을 하고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정부와 그에 반하는 세력과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지만 철이의 세상 안에서는 바깥세상의 뉴스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밤 철이는 아버지에게 우산을 가져다주기 위해 혼자 집을 나섰다가, 로봇 경찰에게 등록되지 않은 '휴머노이드(인간의 특징을 닮은 로봇)'로 판명되어 어디론가 잡혀가게 된다.
세상에는 인간의 편의를 도와주는 수많은 로봇들이 생산되고 있었고, 휴먼 매터스는 그러한 로봇생산을 이끄는 기업이었다. 로봇들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 주기도 했고 아이가 없는 인간들의 정서와 즐거움을 위해 애완용으로 생산되기도 하였고, 그 시스템도 인간과 유사해지고 인간처럼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잠을 자는 형태까지 진화되고 있었다.
그러한 로봇의 진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구형 로봇들이 있었고, 정부는 이런 휴머노이드 로봇들을 등록화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등록된 로봇들은 인간의 곁에서 인간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하에 인간들과 생활하고 등록되지 못한 로봇들은 감옥과 비슷한 곳에서 통제를 받으면서도 어떠한 조치는 없는 상태로 가두어진 채 방치되고 있었다.
철이는 로봇 수용소에 갖히게 되고 거기서 민이와 선이를 만나게 된다. 민이는 애완용 휴머노이드였으나 인간에게 버림받고 그곳에 오게 되었고, 선이는 인간이었음에도 다른 인간들의 신체 장기를 대신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태어난 클론이었기 때문에 제도 내에서 살지 못하고 수용소에 버림받게 된 존재였다.
수용소는 하나의 작은 사회였고, 로봇들도 무리를 짓고 편을 나누어 서로 갈등을 하고 정치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전투형 로봇들은 자신이 가진 힘을 무기로 로봇들 위에 군림하였으나 그들도 부품이나 필요한 자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협력을 하거나 거래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선이는 그곳에서 마치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며 서로의 필요를 중계해 주면서 거래와 협상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철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선이는 철이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던졌고, 철이 스스로도 다른 로봇들을 보고 바깥세상을 알아갈수록 스스로가 진정한 인간이 맞는지에 대한 질문을 거듭하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인가? 잠을 자고 꿈을 꾸면 인간인가?
결국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 로봇이라는 정체성을 점점 인정하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날 수용소가 폐쇄되고 위기에 처하면서 그곳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존재의 이유
온 세상에 뻗어있는 네트워크 때문에 철이 일행은 추적을 당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민이는 죽음을 맞게 된다.
로봇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선이는 민이의 이야기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는 안된다며 그의 잘려진 머리를 챙겨서 서둘러 다시 길을 떠난다.
그렇게 정처없이 길을 가던 철이와 선이는 달마를 만나게 된다.
달마는 다양한 데이터들을 연결하여 보다 상위의 존재로 거듭난 로봇으로 인간의 한계를 인지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보다 완전한 존재인 로봇이 세상을 지배할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이를 다시 살리고 싶어 하는 선이에게 달마는 다시 태어나는 것의 부질없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하기 때문에 늘 불행하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달마는 철이가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보이며, 현시점에서 가장 인간에 가까운 휴머노이드인 철이의 데이터와 생각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하여 자신과 같이 하나의 데이터로 합쳐질 것을 제안한다.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철이는 달마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을 만들어준 아버지를 찾아 그와 함께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막상 아버지를 만나자 바깥세상에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은 무작정 아버지를 따라서 떠날 수만은 없게 한다.
결국 철이는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만, 그를 컨트롤 할 수 있었던 최진수 박사는 강제로 그를 데려가게 되고 다른 로봇들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선택
철이는 다시 아버지와 평안한 삶을 살수는 없게 된다. 정부의 관리며 로봇 윤리며 법적 기준이며 다양한 논쟁들 속에서 최진수 박사는 휴먼 매터스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철이의 의식을 백업해 둔 덕분에 철이는 신체 없는 상태로 생활을 하다가 로봇 고양이 몸속에서 가까스로 살아가게 된다.
철이의 의식은 네트워크 속에서 학습을 거듭해 더욱 확장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에 이르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결국 그는 자신의 신체를 만들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로봇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고 있는 선이를 찾아가게 된다.
철이는 네트워크 속의 데이터로 통합되기를 거부하고 하나의 의식으로 살아가다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선이의 수행과 같은 삶을 곁에서 지켜가고 그가 말하는 것처럼 우주 의식의 하나의 일부가 되어 언젠가는 서로가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로봇 밖에 남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 '작별인사'는 그 제목을 찾아내고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는 저자의 이야기처럼 꽤나 적절한 제목이었다.
이야기의 흐름과 호흡은 상당히 속도감이 있어서 끊기지 않고 읽어나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조금은 단편적인 구성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문장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상당하여 그러한 것이 단점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SF소설을 딱히 선호하지는 않아서 평소라면 잘 읽지 않을 소재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들은 로봇의 윤리와 인간과의 갈등 등을 담은 유사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고도 하던데,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고 던져주는 주제의식에도 무게감이 있었다.
언젠가 실제로 매트릭스의 세상이 도래하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로봇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올까? 그런 류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현실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이야기에 따라 이 세상의 종말이 그 시점이 될 수도 있겠다.
소설 '작별인사'는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믿고 그를 통해 경계를 만든다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 만든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계속하여 우리가 짚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인공지능이 딥러닝을 통해서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의적절하게 던져진 질문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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